제사와 기독교(펌글)


여전히 명절이나 제사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기독교인이 많습니다. 제사를 지내야 하는지, 절을 해야 하는지, 제사 음식은 먹어도 되는지, 질문거리가 많습니다. 이는 하루 이틀 된 논쟁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때도 유사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제사를 둘러싼 문제를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풀어 가야 할까요.

로고스서원 대표인 김기현 목사는 2006년 9월부터 11월까지 <뉴스앤조이>에 '제사'를 주제로 글을 연재했습니다. 여전히 제사와 관련한 논의를 할 때 가치가 있는 글들입니다. 필자인 김기현 목사의 허락을 받아 연재 글 일부를 묶어서 편집한 뒤 게재합니다. 많은 이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으레 명절이나 제사가 되면 그리스도인들은 곤욕을 치르게 됩니다. 밖으로는 "너희 예수쟁이들은 조상도 없냐? 부모도 없냐?"는 핀잔을 듣기 일쑤이고, 안으로는 우상숭배에 동의하면서도 '과연 제사가 우상숭배인지'에 대해서 스스로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참 난감합니다. 언제나 대안은 본질의 회복입니다. 본래의 근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최상의 방도입니다.

모든 종교에는 제사가 있습니다. 그 핵심은 '기념'(memory)입니다. 기념이 제사의 본질이라는 점에서는 유교의 제사나 기독교의 예배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유교는 조상의 은덕을 기억하고 군사부에 대한 충성과 효를 교육하려 한다면, 기독교는 출애굽의 하나님의 은총을 상기합니다. 신명기는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을 '기억 vs 망각'의 구도로 풀이합니다. 신약은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되풀이합니다. 대상의 차이는 있지만 '기념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합니다.

안타깝게도 현재의 제사는 지나치게 형식을 강조합니다. 음식을 차려 놓았는가와 절을 했는가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조상 공경이 제사라면서도 조상에 대한 일절 언급이 없으니, 이 경우가 본말 전도에 해당하겠지요. 이스라엘의 예배를 두고 이사야 선지자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멀리 떠나 있다고 혹평했는데, 현재의 제사가 그런 형국입니다. 말로는 조상을 찾지만 제사 의무를 다했다는 자기만족, 조상에 대한 예의가 있다는 도덕적 관념, 타인의 따가운 시선 의식, 조상 잘 섬겨 복 받겠다는 기복 신앙이 마음에 가득합니다.

제사의 본래 정신은 살리고, 그 형식은 타파해야 합니다. 우선, 버려야 할 것은 절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인에게 예의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그리스도인에게는 우상숭배로 보입니다. 다음으로 수용해야 할 것은 음식입니다. 음식은 우리를 더럽게도, 거룩하게도, 만들지 못하는 것이므로 자유해야 합니다. 차례 상을 준비하는 것이나 먹고 마시는 것은 즐겁게 해도 좋습니다. 되찾아야 할 것은 기념입니다.

순서에 따라서 제사를 해치우는 대신에 자녀들에게 선조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간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함이 없는 예배는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듯이, 선대를 회상하지 않는 제사는 죽은 제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이분법적이고도 단선적 질문과 논쟁보다는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제사 때 절해도 되나

 

제사에 있어서 드릴 것이냐 말 것이냐, 드렸는가 말았는가를 가늠하는 잣대로 절을 많이 생각합니다. 많은 이들에게 절은 단지 선조에 대한 효성을 표시하는 의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돌아가신 어른에 대한 공경심의 발로로 절하는 것을 우상숭배로 단죄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배타성에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기독교는 우상숭배라고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문제는 유교와 그 의식인 제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달려있습니다. 유교가 종교인가 사상인가를 두고 논쟁이 있습니다. 그만큼 유교 자체가 양면성이 다 있나 봅니다. 만일 유교가 인간의 윤리와 국가의 통치 철학으로 국한한다면, 제사와 절은 우상숭배가 아닐 겁니다. 그러나 서구적 의미의 종교와는 다르더라도, 효의 실천으로 축소하기에는 '하늘' 등의 개념은 도덕의 범주를 벗어나 종교로 확대됩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의 김경일은 제사의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조상은 조상신이라고 합니다.

현재 상황은 유교가 종교로서의 가치를 상실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고려 후기로부터 지금까지 600년 동안을 한국인의 내면세계를 지배한 유교가 쉽사리 물러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국인의 무의식을 좌우하는 가치 규범이기는 하지만, 기독교와 불교 등과 같은 지위와 역할, 영향력을 차지하지는 어려울 것입니다.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교가 종교보다 윤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은 제사를 하나의 풍습일 따름이라는 결론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듯이 보입니다. 종교인지 철학인지 애매하고 종교적 특성을 많이 잃어버린 상황에서 오랜 전통이라고 대놓고 반대하는 것이 부당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논리에 기댄 제사와 절의 요구는 과도하거나 빈약해 보입니다. 도리어 그렇다면 집착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모든 전통이 늘 갱신되듯이 제사의 본령을 복원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게다가 조상이 전쟁·농사·날씨·질병 등을 관장하는 전천후적 존재이고 당대의 수많은 신들 중에 유독 조상신만을 숭배하게 되었다는 김경일의 말이 옳다면, 그 종교성이 많이 약화되었다고 하나 한갓 조상에 대한 공경이라는 말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제사상에 절하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을 형상으로 만드는 것과 그 형상에 절하는 것을 단호하게 금지하는 것은 성서의 정신이자, 역사적 전통입니다. 십계명의 명령,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왕의 형상을 신격화한 것에 대한 저항, 일제 때 주기철 목사님 등의 신사참배 거부 운동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개신교는 제사를 금합니다. 개신교뿐만 아니라 가톨릭(후에 입장을 변경합니다만,) 모두 초창기부터 제사를 금지했습니다. 하여, 제사를 드릴 때 정중하게 사양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제사 음식, 먹어도 될까

 

우리 사회에서 제사 문제로 갈등을 빚는 또 하나의 요소는 음식 문제입니다. 특히 보수적 기독교인들에게 문제가 됩니다. 제사 때 사용한 음식을 먹는 것은 무언가 꺼림칙하다는 느낌을 떨치기 쉽지 않습니다.

초대교회에도 우리와 유사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롬 14-15장, 고전 8장). 이교의 문화에서 이방 종교의 제사에 드려졌던 음식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는 심각한 고민거리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음식을 먹을 것인가를 두고 많이 다투었습니다.

바울은 음식에 관한 확고한 원칙을 갖고 있습니다. 만물이 하나님에게서 왔으므로 그 모든 것은 선합니다(고전 8:6; 딤전 4:4). 제사 음식도 다를 바 없습니다. 하늘과 땅에 소위 신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은 무에 지나지 않으니(고전 8:5) 그것들에게 바쳐진 음식은 한갓 음식에 불과합니다. 그러기에 선한 하나님이 내어 주신 모든 음식은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딤전 4:4). 우리는 제사 음식에 대해서도 자유로울 필요가 있습니다.

음식은 선하지만, 거룩과 무관합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경건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이 정결법과 안식일 규정을 철저히 준수했지만, 외양과 달리 그들의 내면은 결코 정결하지도, 안식을 누리지도 못했다는 점을 떠올리면 되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그 자체로 속된 것은 없습니다. 다만, 부정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만 부정합니다(롬 14:14).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음식이 아니라 마음이 문제입니다. 그저 감사함으로 알맞게 드시고, 지금도 굶주리는 이웃들을 돌아볼 마음이 있으면 족합니다.

헤이스는 바울의 가르침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요지 A: 모든 행동은 자신들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길을 찾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만 한다. 요지 B: 이러한 원칙의 틀 내에서,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감사함으로 취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린다."(<고린도전서>, 리처드 헤이스 지음, 한국장로교출판사 펴냄, 297쪽)

이런 허용은 "자신들의 가정집에서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이교 예배와 연결되지 있지 않는 한, 사회적 행사에도 적용"(300~301쪽)됩니다. 그런 음식은 얼마든지 먹어도 좋다는 것이지요. 이교도의 제사와 음식을 거부한다고 해서 너무 멀리 나아가지 말라는 겁니다. 자유에 율법이라는 족쇄를 채워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굳이 그리스도인들이 제사 음식을 먹을 필요가 있느냐고 항변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합니다. 제사 음식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먹는 신자를 보고 근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먹지 말라고 합니다. "음식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가게 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안 먹었다고 해서 손해될 것도 없고 먹었다고 해서 더 이로울 것도 없습니다."(고전 8:8, 공동) 음식으로 인해 다른 신자의 마음을 상하게 할 필요가 없으며, 신자 간에 갈등을 빚을 필요도 없으며, 더군다나 자기 믿음 강함을 자랑할 일이 아니라면 절제해야 합니다. 개인 믿음보다 공동체의 덕이 우선합니다.

 

제사, 기독교적 의미로 변혁하자

 

 

제사의 본질은 기억과 기념이므로 그에 걸맞게 제사하자고 했고, 절하는 것은 성서와 한국교회사에서 우상숭배로 단죄되었으므로 반대해야 하고, 음식은 음식 그 자체로 경건과 무관하므로 자유롭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쯤하면, 제가 말하는 바가 유교적 제사 참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식 추도 예배입니다.

다만, 불신자들과의 대화에 있어서 그들도 설득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마련하고자 했기에 딱히 추도 예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비본질적인 것에 관용과 자유를 허용함으로써 갈등을 상대적으로 줄여 보고자 했습니다. 요는 제사를 폐지하자고 싸우지 말고, 그 제사를 그들도 동의할 수 있는 방식의 제사, 그러면서도 기독교적 의미로 변혁하자는 것입니다. 타협하지 않되, 양자가 공히 동의할 수 있는 지점을 점차 넓혀 나가자는 것입니다.

한 가족이 둘러앉아 고인의 평상시 삶에서 자녀들이 배워야 할 것, 기억해야 할 것, 혹은 잘못된 것을 잘 가려서 들려주는 것, 그리고 준비한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 것, 그러나 종교적 의미가 너무나 강한 절하는 것은 금지하는 것이 바울이 말한 이교도 신전에서 드려지는 제사에 참여하는 것과 같은 것일까요. 그렇다고 이교도, 곧 불교나 무교, 더 나아가 유림의 제사에 참여해도 좋다는 것이나, 그런 자리에서 음식 먹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 적은 없으며, 그럴 의사도 없기 때문입니다.

 

댓글목록